이길래, 질래?
승패에 연연하고 목숨 거는 사회다.
모든 것이 승부가 된다.
스포츠, 게임, 경연처럼 승자와 패자가 분명히 결정되는 시스템이 모든 분야에서 흔하고, 그 바깥에서도 버릇처럼 등수를 매기고 승패를 나눈다.
이겼어, 혹은 졌어, 말하면서 스스로를 몰아세워 스트레스를 굳이 만들기까지 한다.
나는 묻고 싶다.
패배가 나쁜가?
패배가 틀렸나?
이겨서 좋을 건 뭘까?

왜 남 위에 올라서고 싶어하는지 모르겠다.
서열짓는 것만큼 인간같지 않은 것도 없다.
그런데 그걸 남성이 동물적으로 가진 ‘수컷’ 본능이라고,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서열화가 동물적이라는 거, 칭찬으로 생각한다면 곤란하다.
서열이고 승패고 의미없다.
다같이 잘 살아가는 게 왜 이렇게까지 힘든 일인지.
누군가보다 더 잘하고 싶고 더 잘나보이고 싶어하는 욕망, 상대적 우위를 점하고 싶은 욕망은 본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좀 더 옹졸하다.
혼자 잘 하면 될 것을, 남 위에 서야만 자기 자아 실현이 된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남보다 잘나고 싶은 옹졸한 욕망은 남의 이마를 기꺼이 밟게 만든다.
제 이마에 구둣발 자국이 진한 것은 모르고.
이 발자국이 굴욕적이라고들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마 위 자신의 발은 자랑스러운 것일까.
왜 그럴까?
왜 승리는 자랑스럽고, 패배는 굴욕적이라고 인식될까?

종교나 철학에서 말하는 선은 보편적인 승리로 표현되지 않는다.
선의 승리는 언제나 패배에 가깝게 보인다.
내어주고, 낮아지고, 빈손이 되고, 또 희생하는 방식의 승리이기 때문이다.
기도했더니 잘됐다는 기복의 원리는 내가 말하는 선과는 다른 영역이니까 논외로 하자.
예수를 예로 들어보겠다.
그는 헌금하고, 오래 기도하고, 교회에서 열심히 한다고 복을 주고 승리를 주겠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논리는 입고 있는 옷을 모두 벗어서 가난한 자에게 주라는 쪽에 가깝다.
그리고 세금이나 잘 내라고 했다.
나를 해치는 사람을 원망하지 말고 더 해치게 놔둘 정도로 사랑하라고 했으며, 소외된 자들과 함께 있으라고 했다.
그의 논리는 승리에서도 기복에서도 멀다.
예수처럼 살자는 건 아니다.
불가능한 소리니까.
그래도 나는 선택을 할 수 있다.
자랑스러운 승리보다, 굴욕적으로 보이는 패배를.
그건 굴욕이 아니다.
그건 선이다.

나는 지고 살련다.
지고도 잘 살고 있다.
essay, may 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