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학 읽기: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자라면서요?

그 시절에 나는 연극에 돌아 있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공연을 봤고, 연극 연출가가 되고 싶었고, 희곡도 쓰고 싶었다.
그때 문지 스펙트럼에서 나온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샀다.

분명 읽긴 읽었는데,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더라.
내가 어리기도 했고 공부가 짧기도 했다.

올해 초봄, <시학>을 다시 집어들면서 비극을 정복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는 자타공인 알아주는 비극 덕후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그리스 고전의 글쓰기에 대한 책이라니, 아무래도 제법 기대를 했던 모양이다.

시학 책 표지

실망이 컸다.

귤

그 유명한 카타르시스에 대해서 먼저 짚고 넘어가본다.
카타르시스가 무엇인가.
솔직히 나는 모르겠다.
카타르시스에 대해서 따로 크게 궁금해한 적이 없었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했던 말이라고 알아서 설명을 좀 해주겠거니 생각했는데, 내용에 카타르시스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
제6장에 한 번 언급되기만 했다.
끝까지 읽고 나서 카타르시스는 아리스토텔레스(저자라고 칭하겠다. 여덟글자 너무 길다.)가 딱히 강조하고 싶은 개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도.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중요하게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만 다시 한 번 강조해둔다.

귤

카타르시스 말을 해서 말인데, 저자는 꽤 많은 부분을 자세히 언급하거나 설명하지 않는다.
어디어디에서 다루었으니 생략한다, 라거나 별로 설명 안 한 것 같은데 이상으로 충분히 설명하였다, 라거나.
모든 부분이 그런 건 아니다.
저자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부분은 설명한다.
아주 자주.
수도 없이.
반복한다.

<시학>의 결론을 내리자면 이렇다.
비극은 희극보다 낫고, 서사시보다 나으며, 그 이유는 비극이 개연성과 필연성, 일관성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수준낮다고까지 한다.
그리고 비극의 인물, 플롯, 서사 모든 것에서 개연성, 필연성, 일관성이 중요하다고 말하는데 책 내내 하는 얘기가 그것이 전부다.
개연성.
필연성.
일관성.
내가 저자처럼 굴자면, “자세한 내용은 <시학>에 설명되어 있으니 생략한다.”고 하겠지만 나는 그래도 조금 설명해보도록 하겠다.

이해한 바로는 이렇다.
모든 서사와 플롯(서사와 플롯의 차이까지는 설명할 필요 없겠지?), 인물은 하나의 일관된 모습으로, 받아들여질 만하게, 이해할 만하게 나타나야 하며, 필연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예를 들어, 현실성 없는 사건이지만 일어날 법한 것과 현실성 있는 사건이지만 일어날 법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작가는 전자를 선택해야 한다.

귤

저자가 희극과 비극에 대해 설명한 내용이 이렇다.
희극은 사람들을 보통보다 못나게, 비극은 더 잘나게 나타낸다.
이유는 이렇다.
당시 희극은 평균보다 못난 사람들의 결점을 과장하여 우스꽝스러움을 유도했고, 비극은 뛰어난 자의 인간적인 추락이나 몰락을 통해 비극적 감정을 만들었다.
이것이 미메시스에 대한 장이었다.

여기서 희극에 대해서 조금 언급하고 싶다.
요즘도 어떤 희극인들은 이런 태도를 유지하던데, 상당히 비판할 지점이다.
희극 속에서 보통 사람보다 못난 우스꽝스러운 인물을 우습게만 소모한다는 건 도구적인 사용이고, 관객의 우월감을 자극하는 상황에 지나지 않는다.
이건 인간 존엄성이라는 것을 잃은 상태다.

유명한 예능 프로그램들에서 이런 류의 희극성을 많이 사용한다.
사람 하나 몰아가서 바보 만들고 주변에서 깔깔거리고 낄낄거리고 손가락질하고, 그 사람은 민망하고 창피해서 숨거나, 화내거나, 도망가는 상황.
다들 익숙하지 않나?
나는 그걸 보고 웃기만 할 수 없었다.
미안했고, 같이 창피했다.

까놓고 말하자.
평균보다 못난 사람이라는 게 어디 있는지, 있으면 나한테 데려와라.
여기서 진짜 데려오겠다고 나서려는 사람은 당신의 인간성을 좀 의심하기 바란다.

세상에 못난 사람도 잘난 사람도 없다.
사회적 강자와 약자가 있을 뿐이다.
이것으로 사람을 급나누기하고 희극이니 비극이니 나눈다는 건, 아까도 언급한 존엄성에 대한 문제가 야기되는 거다.

귤

희극과 관련하여, 저자의 문장 중에 이런 것이 있다.
희극에서는 내용상 (…생략…) 철천지원수 사이일지라도 종말에 가서는 서로 친구가 되어 퇴장하고 아무도 죽지 않는다.

비극은 고통을 마주하는 서사다.
희극은 상처를 남기지 않는 서사다.
아무도 죽지 않는다는 말은, 실제 육신, 마음, 영혼의 죽음이 없다는 말로, 곧 남겨진 파편이 없다는 말이다.
반대로 비극은 죽고 망가지고 잃고 또 남겨진다.

비극을 사랑하는 이유도, 희극이 사랑스러운 이유도 이것이다.

귤

내 제목으로 돌아가본다.
철학자라면서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요하니까 이름으로 한번 더 언급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태도가 틀려먹었다.
당시 그리스 철학의 태도가 ‘진리는 자격이 있는 자에게 주어진다’ 같은 거였나?
설명은 짧고, 생략은 많고.
배우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사용한다.

진리는 모두에게 주어져야 한다.
진리를 바라는 모두에게, 차별 없이 주어져야 한다.
그래서 철학자의 언어는 쉬워야 하고, 철학자의 태도는 낮아야 한다.

그리고 나도 안다.
현대 철학도 엘리트주의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거.

난 어느 쪽도 편들 생각이 없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 선생님.
철학자라면서요?
당신의 철학은 누굴 위한 것인가요?

review, may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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